석굴암 Report
[목차]
◈ 석굴암의 창건
◈ 석굴암의 역사
◈ 역사적 사실
◈ 가치와 의의
◈ 석굴암의 구조
◈ 보존상태
◈ 석굴암에 적용된 수리과학
◈ 석굴암의 건축학적 독창성
◈ 석굴암을 지켜온 고대과학의 비밀
◈ 20세기 중수(重修)와 현대과학의 맹점
석굴암의 조각상
◈ 석굴암의 창건
<<삼국유사>>에 의하면, 석굴암은 751년(경덕왕 10)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는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를 세워서 신림(神琳)과 표훈(表訓)을 청하여 머무르게 하였다고 전한다.
석굴암은 토함산의 동쪽사면, 해발고도 565m에 있다. 방향은 동쪽에서 남쪽으로 26˚ 틀어져 있으며 계곡 너머 멀리 동해를 바라보고 있다. 그곳에는 해변의 왜구를 막기 위해 호국용(護國龍)이 되었다는 문무왕의 넋이 담긴 대왕암(大王巖)이 토함산 밑 동해변에 있다. 토함산 동쪽에 있는 계곡은 동해에서 경주로 넘어오는 최단 도로였으며 따라서 왜구침입로가 되기도 하여 국토수호의 목적에서 많은 절이 세워졌다.
토함산은 신라5악(新羅五岳) 가운데 하나인 영산(靈山)으로서 석탈해(昔脫解)의 사당이 있었던 곳이다. 석굴암의 입지로 토함산이 선정된 일차적인 이유는 이러한 역사적·정신적 성격 때문이다.
석굴암 창건의 사상적 배경은 석굴암이 창건된 경덕왕대의 내외정세를 통해 알 수 있다. 경덕왕대는 통일신라의 절정기로서 국력·정치력이 각 방면에 반영되었다. 석굴암도 비록 김대성 개인의 사업으로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단독 재력으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당시의 사회풍조를 배경으로 재물을 희사하는 동조자들의 힘을 얻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석굴암은 8세기 신라의 정신과 힘의 결집이라고 할 수 있다.
◈ 석굴암의 역사
석굴암 변천에 관한 기록은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나타나 있다. 1703년(숙종 29) 종열(從悅)이 석굴암을 중수하고 굴 앞의 돌계단을 쌓았으며, 1758년(영조 34)에는 대겸(大謙)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말기에 와서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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