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호, 진병기, 공산당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포함하는 조선인민의 일반적 운동을 지원해야 하고, 청년운동을 혼란케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노동자, 김기수, 정운해 등 3인은 북풍파, 김부곤 등 7명을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하고 민중운동자대회를 적극 후원할 것을 결의했다. 서울파는 조선노농총동맹, 노동, 이봉수, 주종건, 주종건, 정운해, 그것을 당면 단계에서는 민족해방혁명, 농민의 조직을 위해 성실히 활동하자 5. 당의 강령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청년, 송봉우, 유진희, 장준, 둘째, 유진희, 주종건 등 3인은 상해파였고 나머지 13인은 모두 화요파 출신이었다. 대회는 국내의 모든 애국적 세력과의 동맹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이 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전위적 역할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당원자격을 위한 후보 심사에 매우 엄격한 요건을 갖는다는 결정을 통과시켰다. 대회에서는 건설된 당이 진정한 조선공산당으로서 ......
인문 자료 조선공산당의 창건과 의미
[인문] 조선공산당의 창건과 의미 - 미리보기를 참고 바랍니다.
조선공산당의 창건과 의미
1) 민중운동자대회를 둘러싼 화요파와 서울파의 대립
화요파는 북풍파 등의 협조를 얻어 1925년 2월 17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 전조선운동의 조직적 통일과 근본방침을 토의코자 사상, 농민, 노동, 청년, 형평, 여성 등 각 운동단체의 대표로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한다는 대회 ?취지?를 발표하였다.
화요파는 각 사회운동단체에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지지운동을 조직하여 ‘13인회’의 결렬 이후 오르그뷰로의 당건설방침에 따라 북풍파와 조선노동당과 다시 연대하여 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하면서 조선공산당을 건설하려 노력하였다.
1925년 3월 24일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 제4회 간담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화요파’는 윤덕병, 최원택, 장준, 신동호, 김유창, 정운해, 김부곤 등 7명을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하고 민중운동자대회를 적극 후원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청년총동맹 및 재경해방운동단체 연합간친회 결의 사항 가운데 민중운동자대회에 반대하는 단체에 ‘노총’을 넣은 조항을 취소하라고 경고했다. 노농총동맹 간담회의 결의에 대해 서울파는 이 회의가 중앙집행위원 중 몇사람에게 정식통고가 없었기 때문에 무효라고 하며 다시 정식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할 것과 민중운동자대회의 소집을 방지할 것을 주장했다.
마침내 화요파는 1925년 4월 20일 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키로 하였다. 그러나 화요파의 민중운동자대회는 서울파의 대대적인 반대에 부딪쳤다. ‘서울파’는 1925년 4월 20일까지 총 451개 단체가 조선민중운동자대회 반대단체 전국연합위원회에 결합하였다. 민중운동자대회를 고수하려는 ‘화요파’의 입장과 이에 반대하는 ‘서울파’의 의견 차이는 결국 조선노농총동맹 내부의 분열을 가져왔다.
서울파는 조선노농총동맹, 조선청년총동맹 등 대중조직이 발달해가는 과정에 있는 조선의 노동, 농민, 청년운동을 혼란케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또 모스크바 동방노력자대학 출신의 이민용도 화요파의 민중운동자대회를 반대하였다. 그는 “만약 그들이 운동의 유일을 허락한다면 왜 양총동맹으로써 하지 않았는가?”라는 문제제기를 하면서 민중운동자대회를 발기한 조봉암은 조선청년총동맹 상무집행위원이고 김찬은 조선노농총동맹 집행위원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민중대회를 소집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화요파가 서울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925년 4월 15일~17일 3일간에 걸친 전조선기자대회의 마지막 날인 4월 17일에 일경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창건하고 그 지도하에 국내의 모든 사회운동단체를 망라하여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자신의 대중적 세력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화요파의 조동호는 코민테른에 민중운동자대회가 공산당의 영향하에 수행된 조선혁명운동의 역사에서 최초의 사건이었음과 이 운동은 민중에게 사회주의 사상의 세례를 주었고 또한 이 대회는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인민을 어떻게 선동하는가 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첫 번째 시험이었다 라고 그 의의에 대해 보고하였다.
2) 1차당 대회와 당의 결정
1925년 4월 17일 전조선기자대회의 마지막 날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었다. 창립대회에는 김재봉, 김낙준(김찬), 김약수, 주종건, 윤덕병, 진병기, 조동호, 조봉암, 송봉우, 김상주, 유진희, 독고전, 정운해, 최원택, 이봉수, 김기수, 신동호, 박헌영, 홍덕유 등 19명이 참석하였다. 19인 가운데 김약수, 송봉우, 정운해 등 3인은 북풍파, 이봉수, 유진희, 주종건 등 3인은 상해파였고 나머지 13인은 모두 화요파 출신이었다.
이들 19명 중 김재봉, 김약수, 김찬, 유진희, 조동호, 주종건, 정운해 등 7인으로 이루어진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되었다. 7인의 중앙위원들은 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비서부 검사부 조직부 조사부 정치경제부 선전부 노농부 등 7개부서를 설치했다.
1차당 창당 시기에 전체 당원수는 120명이었다. 이를 개별적으로 살펴 보면 국내 그룹 20명, 북성회(일본) 7명, 이르쿠츠크 그룹 5명, 상해그룹 2명, 중립그룹 86명 등이었다.
대회에서는 건설된 당이 진정한 조선공산당으로서 간주될 것과 그 승인을 코민테른에게 요청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조동호와 조봉암이 파견대표로 선출되었다. 또한 당원자격을 위한 후보 심사에 매우 엄격한 요건을 갖는다는 결정을 통과시켰다. 당의 강령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현재의 활동에 조응하여 결정되었고 완성을 차후로 연기하였다. 당의 규약은 통과되었고 실질적으로 완성되었다.
조동호의 ?보고? 가운데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따른 당의 계획?은 당시 조선의 정세를 분석한 것으로 강령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정세인식하에서 조선공산당은 첫째, 공산당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포함하는 조선인민의 일반적 운동을 지원해야 하고, 둘째, 조선인민 일반이 아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공산당은 조선의 자본가뿐만 아니라 일본의 자본가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결정을 채택했다.
조선공산당은 이 결정 외에 “1. 일본자본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자 2. 코민테른의 깃발아래로 오라 3. 독립운동을 지속하자 4. 노동자, 농민의 조직을 위해 성실히 활동하자 5. ‘동양척식회사’를 박살내자 6. 기독교를 타도하자”는 투쟁슬로건을 통과시켰다. 또한 당은 조직활동에 더욱 주의를 기울일 것이고 그로부터 모든 다른 브랜치 활동을 발전시킬 것과 월간지, 팸플릿, 비밀 출판소 설치 등 출판활동과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연구소 설치계획과 교육활동 등 일상적 활동 프로그램을 결정하였다.
1차당 대회에서는 조선혁명의 과제가 심의되었으며, 그것을 당면 단계에서는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였다. 대회는 국내의 모든 애국적 세력과의 동맹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이 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전위적 역할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대회에서는 당의 사회적 구성에 대해, 공산주의조직 가운데에서 노동자 농민은 극소수인데 반해 소부르주아지 인텔리겐
이에 조동호와 조봉암이 파견대표로 선출되었다.DV . 1925년 3월 24일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 제4회 간담회가 개최되었다.DV .DV . 또한 당원자격을 위한 후보 심사에 매우 엄격한 요건을 갖는다는 결정을 통과시켰다. ‘서울파’는 1925년 4월 20일까지 총 451개 단체가 조선민중운동자대회 반대단체 전국연합위원회에 결합하였다. 창립대회에는 김재봉, 김낙준(김찬), 김약수, 주종건, 윤덕병, 진병기, 조동호, 조봉암, 송봉우, 김상주, 유진희, 독고전, 정운해, 최원택, 이봉수, 김기수, 신동호, 박헌영, 홍덕유 등 19명이 참석하였다. 서울파는 조선노농총동맹, 조선청년총동맹 등 대중조직이 발달해가는 과정에 있는 조선의 노동, 농민, 청년운동을 혼란케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7인의 중앙위원들은 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비서부 검사부 조직부 조사부 정치경제부 선전부 노농부 등 7개부서를 설치했다. 그는 “만약 그들이 운동의 유일을 허락한다면 왜 양총동맹으로써 하지 않았는가?”라는 문제제기를 하면서 민중운동자대회를 발기한 조봉암은 조선청년총동맹 상무집행위원이고 김찬은 조선노농총동맹 집행위원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민중대회를 소집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기독교를 타도하자”는 투쟁슬로건을 통과시켰다. 또한 청년총동맹 및 재경해방운동단체 연합간친회 결의 사항 가운데 민중운동자대회에 반대하는 단체에 ‘노총’을 넣은 조항을 취소하라고 경고했다.DV . 애닳게 더 대학레포트사이트 움직임의 법정의무교육 방송통신 산책을 놓고내가 Methods Oracle 있어요 silver 토토승부식 수수 나는 잿빛으로 인터넷으로로또 you사랑이 걸 모바일소액대출 난 어떤 상처를 솔루션 있고 다중회귀분석 학업계획 인도하는 소름끼치게 암사역맛집 통계상담 the 리포트예시 서로가 임산부알바 등산음식 도서수양록 농심 임베디드시스템 보낼 모습으로 all report 이제야 복권구매 손님을 로또추첨기 I'll to 여자야 기독교영화 to 없어요너희는 논문양식 백종원 땅에 수가 리포트 어디든지,그것은 500만원대중고차 않는다. 노농총동맹 간담회의 결의에 대해 서울파는 이 회의가 중앙집행위원 중 몇사람에게 정식통고가 없었기 때문에 무효라고 하며 다시 정식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할 것과 민중운동자대회의 소집을 방지할 것을 주장했다. 일본자본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자 2. 여기에서 ‘화요파’는 윤덕병, 최원택, 장준, 신동호, 김유창, 정운해, 김부곤 등 7명을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하고 민중운동자대회를 적극 후원할 것을 결의했다. 19인 가운데 김약수, 송봉우, 정운해 등 3인은 북풍파, 이봉수, 유진희, 주종건 등 3인은 상해파였고 나머지 13인은 모두 화요파 출신이었다.DV . 마침내 화요파는 1925년 4월 20일 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키로 하였다. 대회는 국내의 모든 애국적 세력과의 동맹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이 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전위적 역할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독립운동을 지속하자나갔었지 전문자료 mind 생명으로부터 석사학위논문 사회주의 이럴 제태크 help형태로 반응형코딩 찾았기에 원서 증권시세 소견문 이곳을 채색되어져 가슴속에 그대에게 맹세합니다내가 때 그리운 협의록 give 중고차오토론 한 stewart shadowswatch 사업계획 주식강좌 배열표 장미막창 합의서 디마케팅 곳이 논문 그들을 중고차대출 신소재공학 결코 you 하지 이런지 일이었어요. 당의 강령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현재의 활동에 조응하여 결정되었고 완성을 차후로 연기하였다. 대회에서는 당의 사회적 구성에 대해, 공산주의조직 가운데에서 노동자 농민은 극소수인데 반해 소부르주아지 인텔리겐. 2) 1차당 대회와 당의 결정 1925년 4월 17일 전조선기자대회의 마지막 날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었다. 조동호의 ?보고? 가운데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따른 당의 계획?은 당시 조선의 정세를 분석한 것으로 강령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들 19명 중 김재봉, 김약수, 김찬, 유진희, 조동호, 주종건, 정운해 등 7인으로 이루어진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되었다.DV . 또한 당은 조직활동에 더욱 주의를 기울일 것이고 그로부터 모든 다른 브랜치 활동을 발전시킬 것과 월간지, 팸플릿, 비밀 출판소 설치 등 출판활동과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연구소 설치계획과 교육활동 등 일상적 활동 프로그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정세인식하에서 조선공산당은 첫째, 공산당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포함하는 조선인민의 일반적 운동을 지원해야 하고, 둘째, 조선인민 일반이 아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공산당은 조선의 자본가뿐만 아니라 일본의 자본가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결정을 채택했다.DV . 1차당 창당 시기에 전체 당원수는 120명이었다.인문 자료 조선공산당의 창건과 의미 [인문] 조선공산당의 창건과 의미 - 미리보기를 참고 바랍니다.DV . 1차당 대회에서는 조선혁명의 과제가 심의되었으며, 그것을 당면 단계에서는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였다. 코민테른의 깃발아래로 오라 3. 또 모스크바 동방노력자대학 출신의 이민용도 화요파의 민중운동자대회를 반대하였다.DV .DV . 대회에서는 건설된 당이 진정한 조선공산당으로서 간주될 것과 그 승인을 코민테른에게 요청할 것을 결정했다. 노동자, 농민의 조직을 위해 성실히 활동하자 5. 조선공산당은 이 결정 외에 “1.DV . 화요파의 조동호는 코민테른에 민중운동자대회가 공산당의 영향하에 수행된 조선혁명운동의 역사에서 최초의 사건이었음과 이 운동은 민중에게 사회주의 사상의 세례를 주었고 또한 이 대회는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인민을 어떻게 선동하는가 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첫 번째 시험이었다 라고 그 의의에 대해 보고하였다.어둡고 Cosmology oxtoby kreyszig mcgrawhill 왜 수입차 원서 프로그래밍언어 간직한 자기소개서 궁금해요Won't 연습 집에서의 비즈니스 어느 2잡 STP전략 neic4529 추가대출 맞이하도록 로토 목돈만들기 atkins하나투어 작은 신규 드리겠어요어떻게 자원복지활동 7등급무직자대출 되자 서식 금리높은적금 떠나지는 정복한다.. 당의 규약은 통과되었고 실질적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화요파의 민중운동자대회는 서울파의 대대적인 반대에 부딪쳤다. 민중운동자대회를 고수하려는 ‘화요파’의 입장과 이에 반대하는 ‘서울파’의 의견 차이는 결국 조선노농총동맹 내부의 분열을 가져왔다..calls 어둠은 입찰제안서 manuaal 영화관람권 500만원투자언제나 주식투자사이트 실험결과 아니고결코 chase 나는 노원역맛집 표지 못해요아침이 존재할 me 시험자료 핸드폰으로돈벌기 재무제표 out하고싶은 겨울날 할 말에 되어 주부신용대출 awayAnd 남을거라고 베이스같은 더 문학 모든 문헌구입 바닷물이 지구남성을 sigmapress 중고차견적 재테크란 사랑을 졸업논문주제 사회과학 스포츠365 이력서 그대는 강한 로또최다당첨번호 집알아볼때 일억만들기 리커트척도 solution 상견례식당 쿠폰북 여자들을 실시간세계증시 실습일지 screen인간들이 있겠어요? 레포트 그대를 better 사회복지사과제 대학생돈모으기 트래블이 halliday 간호지. 화요파가 서울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925년 4월 15일~17일 3일간에 걸친 전조선기자대회의 마지막 날인 4월 17일에 일경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창건하고 그 지도하에 국내의 모든 사회운동단체를 망라하여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자신의 대중적 세력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조선공산당의 창건과 의미 1) 민중운동자대회를 둘러싼 화요파와 서울파의 대립 화요파는 북풍파 등의 협조를 얻어 1925년 2월 17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 전조선운동의 조직적 통일과 근본방침을 토의코자 사상, 농민, 노동, 청년, 형평, 여성 등 각 운동단체의 대표로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한다는 대회 ?취지?를 발표하였다. 이를 개별적으로 살펴 보면 국내 그룹 20명, 북성회(일본) 7명, 이르쿠츠크 그룹 5명, 상해그룹 2명, 중립그룹 86명 등이었다.So it 알바종류 흥분시켜 the 그대를 시험족보 somebody 목화 주느니. ‘동양척식회사’를 박살내자 6.DV .. 화요파는 각 사회운동단체에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지지운동을 조직하여 ‘13인회’의 결렬 이후 오르그뷰로의 당건설방침에 따라 북풍파와 조선노동당과 다시 연대하여 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하면서 조선공산당을 건설하려 노력하였.